2019. 10. 21.
 『말과 글의 위선과 한계』
글쓴이: 이동훈  날짜: 2009.06.08. 10:36:38   글쓴이IP: 58.235.179.56
사례 Ⅰ
어떤 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함께 얘기를 하던 그는 교회안의 일들이 어떤 형편에 있고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내게 말해주지 않으면 나도 미처 알 수 없는, 또 내가 바르게 알고 있으면 유익한, 어떤 의미 내가 알고 싶어 하던 내용들이었다. 그는 늘 그랬다. 평소에도 분별력이 있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또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나름의 견해가 분명했다. 그래서 대화중에도 ‘이이는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다시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지적하는 -말하고, 글을 쓰는 것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계속해서 ‘이이는 문제를 알고만 있을 뿐 해결에 도움을 주지는 않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아마도 늘 아쉬움이 많은 대부분의 관리자, 경영자, 목사님들도 나와 같은 경험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예의 이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생각이 있고, 소견이 있어 이를 글로 쓰기도 하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문제는 언제나 있다. 그러다 보니 예의 분석과 평가가 문제해결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있어도 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말과 글을 통해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 해결에 도움을 주는 것은 별개이다. 끝내 아무른 도움을 주지 못하면 그것은 차라리 해악이 되기도 한다. 말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사례II
이이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다. 배운 것이 없고 내어 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평소 누구도 이에게 별로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 그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있지도 않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이이는 그 없는 중에 항상 베푼다. 실은 베푼다는 말도 사치스럽다. 딱히 베푼다고 할 것도 없고-크게 베풀 만한 것도 없으니-그냥 그는 자기 일을 하고, 자기 것을 나누어 준다. 하는 것 같지 않게 제법 자기 몫을 하고, 주는 것 같지 않게 나누어 준다. 이 봐라! 이 사람이야말로 은근히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문득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요란한 글이나 말보다도 베풀고 또 베풀고, 주고 하기를 계속하여 이웃에 유익을 준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가. 주변에는 이렇게 행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변죽만 울리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례III
제법 오래 전 이야기다. 가까운 목사님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잘 아는 어떤 이를 두고 그가 전하는 말씀은 옳은 데 그의 삶은 그렇지 않다며 깊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동료 목사요 그리스도인답게 ‘말씀과 행함’이라는 공동의 주제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내가 했던 말이다. ‘이렇게 풀 수 있지 않을까? 수학 잘 한다고 영어 잘 하는 것은 아니잖아? 공부 잘 한다고 운동 잘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렇게 보면 안 될까?’ 그럴 수도 있겠다며 둘은 박장대소하여 한참을 웃었다. 그러나 나는 돌아오는 길에 내가 제시했던 해법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맞아! 공부 잘 하는 친구 중에 운동 못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그러나 전하는 말씀과 삶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지 않는가! 그럴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떠올리며.....

사례Ⅳ
중학교 시절이다. 40년 더 되는 세월이 흘러 정확히 몇 학년 때인지는 모르겠으나 퀴즈가 나오는 주말이 기다려질 정도로 당시 주말편의 신문 퀴즈를 즐겨 풀곤 했다. 기억하기로는 늘 ‘범인이 누구냐’는 탐정 문제였다. 이따금 정답을 맞추는 즐거움도 즐거움이었고, 틀렸을 때는 아쉬워하면서도 다음 주에 이어지는 정답해설이 무척 흥미로웠다. 아무튼 참 재미있어 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 40대 중반 언젠가 ‘형사 심리학’, 혹 ‘범죄심리학’ 같은 글을 읽다 ‘범인은 사건의 끝났을 때 이익이 돌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을 통해 누구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갔느냐는 것에서 역산하여 범인을 찾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리바이로나 외관상으로는 전혀 범인일 가능성이 없지만 그래서 그게 얼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지만 사건이 종결되었을 때 이익을 챙기는 그가 범인 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때에 숨길만큼 숨길 수 있기도 하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누가 이 사건의 수혜자이냐는 것이 진실의 숨어있는 실마리이다는 말이다. 대단히 지능적인 경우이다.
사례V
「위대한 명성 뒤에 가려진 지식인의 이중성」이라는 부제가 달린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이라는 책을 읽었다. 지식인들은 18세기 후반부터 그 이전 사회를 이끌었던 성직자, 율법학자, 예언자의 자리를 대신하여 인류의 도덕적 스승이자 비평가로 자처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의 인간성과 도덕성은 누가 어떻게 평가하는가? 지식인들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철학을 성립시키고 있으며, 얼마나 세심하게 그 증거를 검토하고 그들은 얼마나 자신이 내걸었던 진리를 존중하며 자신의 생활에 적용했는가 하는 것을 묻는 두꺼운 책이다. 저자는 지식인들이 눈앞의 이익 앞에 그들의 철학을 어떻게 왜곡되었으며 그들의 배우자와 자식들은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들 주변의 지인들과는 얼마나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가를 역사적으로 추적하였다. 루소, 샐리, 마르크스, 입센, 톨스토이, 훼밍웨이, 러셀, 샤르트르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뒤에는 알려진 것과는 너무도 판이한 위선과 허위가 있었다.
루소를 예로 들어보자. 생전에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내가 다른 이들을 사랑한 것처럼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직 태어난 적이 없다” “나는 여태까지 존재 했던 사람 중 가장 좋은 친구로 태어난 사람이다” “나 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런 상황을 이해하면서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여 달라, 나보다 더욱 정답고, 더욱 친밀하며, 더욱 섬세한....” “후손들은 나를 존경할 것이다.” 이 모두는 그가 내 뱉었던 수많은 말과 글의 지극히 적은 일부이다.
루소의 전기 작가 한 사람이 이렇게 지적했다. ‘그는 사람들을 상대로 늘 조그만 덫을 놓아뒀다. 그는 자신의 곤궁과 빈곤을 강조하곤 했다.’ 다음은 더 충격적이다. ‘그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기를 그녀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미명으로 아이의 이름도 성도 지어주지 않은 채 고아원에 갖다 버렸다. 그 후 4명의 다른 아기도 같은 방식으로 처분하였다. 그는 이후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는 변명의 천재였다.’ 루소의 그 유명한 『고백록』이 나오게 된 동기도 이 같은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교육에 대하여, 어린이 양육에 대하여 그렇게 고상한 논리를 많이 펼쳤던 그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루소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명석하지도 사고와 비판능력이 종합적이고 예리하지도 않다. 그래서 보통을 넘어선 지식인들, 영웅들, 천재들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말과 글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낸다. 분명 말과 글은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유익한 수단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말과 글에도 위선과 한계라는 위기가 있다. 따라서 그것이 진정으로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최종 삶이라는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더하여 그 결과물이 무엇이냐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무엇을 말하였으며 무슨 글을 남겼느냐는 것은 어떤 삶을 남겼느냐로 답해야 하고 더욱 그 최후 최종 삶의 결과물이 무엇이냐는 것은 이 모두를 정당화시키는 준거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목사라는 위치에서 바울이 얻어먹었던 ‘저 말쟁이’ 답게 수를 다 셀 수 없는 말과 글을 쏟아 내었다. 그러나 말과 글이 그럴듯하다고 그것이 참 나의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혹자는 글은 속일 수 없다 고도 하나 이는 더더욱 거짓말이다. 말도 속이지만 글도 얼마든지 자신을 속이고 읽는 이를 속인다. 그것의 정당성은 오직 최후의 관문을 통과하고서라야 확정된다. 최후의 열매야말로 숨겨져 있던 배후이다. 말 같고 글 같은 삶의 결과가 없는 말과 글은 죽은 말이요 죽은 글이다. 그것은 진실로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는,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느냐는 엄격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초등학교시절, 당시만 해도 운동을 해서는 먹고 살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눌려 육상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육상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운동을 고집할 수 없었던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난 달리는 것이 좋았다. 그렇다. 이제라도 다시 달리자. 마지막 스퍼트야 말로 진짜 중요하다. 정직하게 살자.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이해와 판단력을 잃지 말자. 그분 앞에 설 때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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