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1.
 소천(召天), 입적(入寂), 선종(善終)
글쓴이: 이동훈  날짜: 2009.03.24. 14:28:11   글쓴이IP: 58.235.179.56
위는 다 죽음과 관련하여 특정 종교에서 배타적으로 쓰는 표현들이다. 외에도 일반적으로 별세(別世)라는 말이 있고 그보다도 더 쉽게 죽음이라는 말을 쓰고 아주 되먹지 못하게는 뒈지다 라는 말이 있는가 하며는 반대로 아주 고상하게 서거(逝去)라는 말도 있다. 개신교에서는 성직자들과 일반교인들을 별도 구분하지 않고 보통 소천-하늘로 부름을 받았다-을 사용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입적이라는 조금 낮선 용어를 쓴다. 이는 적멸(寂滅)의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으로 특별히 중-자기들의 지도자-의 죽음에 대하여 쓰는 용어이다. 금번 카토릭교회 고김수환추기경이 세상을 떠나면서 선종이라는 용어가 세상에 회자했다. 선종(善終)은 중국에서 활동한 카토릭선교사가 신자들이 현세에서 삶과 죽음을 준비하도록 쓴 신앙서적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의 줄임말로 문자적으로는 라틴어mors(착한)bona(종말)을 우리말로 번역한 셈이다. 곧 선한죽음의 뜻이다. 결국 다 죽었다는 뜻의 개별 종교적 표현으로 성직자와 일반인을 구분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 약간 다를 뿐 그게 그 말이다. 이같이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여타의 다른 표현들은 자기들의 관점에서 세속화된 것으로 보고 자기 종교의 관점에서 죽음을 묘사하려하지 아니했나 싶다.
한 사람의 개신교도로 그리고 지역교회의 목사로 일전 고김수환추기경의 선종과 관련하여 개신교회 내에서 그의 죽음과 관련된 표현을 두고 미묘하고도 유치하고도 무지한 말들이 무성한 것을 보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이 시점에서 다시 이를 언급하는 것은 한창의 열기를 피해 필자나 이 글을 대하는 이들에게 공히 좀 더 깊은 성찰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 특별히 몇몇 기독교언론에 실린 글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도록 수준이하의 것이었던 것도 끝내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었던 한 이유이다. 한 마디로 기독교회는 아직 정신 못 차렸다. 함량 미달이고 수준이하이다. 이 정도로는 종교계의 일원으로 제 몫 감당하기도 어렵다.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갈렸다. 첫째, 뭔가 한마디 하기는 해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기도 어려워 현장의 이슈에서 한 발 빼고서 가능한 객관적으로 간결하게 보도하려는 태도였다. 차라리 가타부타 하기 어려우면 언론이라는 객관적 입장에서라도 선택할 수 있었던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둘째는 당시의 여론이 여론이었더니 만큼 적극적으로 기사화하고 입장을 표명한 경우이다. 기독저널로서의 고심을 엿보게 하면서도 책임있고 식견있는 기독저널로는 함량 미달이었지만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셋째는 은근히 부정적 입장이었다. 솔직히는 못마땅하지만 분위기에 눌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은근슬쩍 내심을 드러내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무엇이 객관적인지를 따지는 것 또한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너무 심했다. 고김추기경이 우리 사회의 어른이다 아니다 는 것부터가 단순한 문제가 아니거니와 그렇다 할지라도 신교(信敎)의 자유-여기 자유라는 말에는 다분히 상대적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가 있는 나라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엄연히 해당 종교보다 다수임을 감안할 때 무슨 근거에서인지 대중언론으로서는 많이 오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판단이다. 아마 고인도 저 세상에서 ‘웃긴다,’ ‘민망하다.’하지 아니했을까 싶다. 이점은 언론의 공공성이나 객관적 보도라는 측면에서도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아니했던가 싶다.
문제는 기독교 일각에 있었던 속 좁고-그런 정도라면 애교로 봐줄 수도 있지만-왜곡되고, 잘못된, 대부분 무지에 기초한 시각들이다. 어떤 언론은 선종이라는 표현을 애써 피해 ‘죽음’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고김추기경의 선종에 대한 기독교 일각의 예의와 입장표명에 대하여 꽤 선지자적(?) 질타를 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창피하다. 이렇게 필자가 ‘창피하다’고 하면 또 말꼬리를 붙잡고 되지 않은 자기만의 논리와 독선과 편견 내지 무지로 뭐라 할 테지만 그 정도 무식한 글들을 걸러내지 못하는 언론당사자들도 무능하고 무책임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아직 한국기독교는 정신 못 차리고 있고 그 보다도 너무 무식하다. 중구난방이야 기독교회의 특기 중에 하나이지만 금번에는 심해도 너무 심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필터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똥물 오줌물이 깨끗한 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보통은 통칭해서 별세 혹 죽음이라 하고 쌍놈들은 애써 격식을 갖출 것도 없이 마음대로 한다. 그러나 조금 더 격식을 갖추어 죽음에 대한 자기들의 의사를 표시하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표현으로 인간의 죽음, 자기 종교지도자들의 죽음을 미화 내지 예의를 갖추었다. 이는 상대적인 것이다. 여기 상대적이라는 것은 상대주의와 구분된다. 피차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어디에도 신앙의 배타적 부분까지 양보를 요구한 흔적이 없다. 맹렬한 신앙의 이슈들은 이 대목과 상관없다. 로마카토릭교회 고위 성직자 그나마 우리사회의 존경받는 분이 별세한 것을 그들의 용어대로 불러주는 것을 두고 또 이웃한 교회의 지도자로서 상당한 예의를 갖춰 조의를 표한 것에 대해 ‘종교다윈주의’ 이렇게 하면 정말 웃기는 것이 되고 만다. 기독교회 전체가 그 정도 수준인가 싶어 오해하면 어쩌나 싶도록 아찔한 일이다. 선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고인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은 종교다원주의 하고는 무관한 일이다. 그 엉터리 화자(話者)는 예수 안 믿는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소천’이라고 하지 않을 테지만 혹 예수도 안 믿는 죽음에 대하여 ‘예수도 안 믿던 사람이 잘 뒈졌다.’ 할 지 모르겠다. 아님 목사의 신분으로 아예 그 더러운 죽음을 찾지도 않을지 모를 일이다. 이는 무지의 소치요 맹목적 신앙의 전형이다. 그렇게 몰아 부친다고 당신의 신앙이 더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럴 리가 없거니와 주가 기뻐하시는 더 경건한 모습이지도 않다. 그냥 얕은 지식에서 비롯된 독선일 뿐이다. 아마 한국교회는 그 정도만으로도 교회를 관리하고 먹고 살만한 가보다. 짐작컨대 이보다 더 높은 이해와 분별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교인들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아멘’ ‘할렐루야’ 하며 헌신하고 추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조금만 더 높이서 보면 생각과 논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훤히 보인다. 사방이 막혀있는 우물 안에서는 볼 수 없다. 거기는 분별력을 기대하기 난망한 환경이다. 정통개신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입장에서-이도 상당히 무리가 있는 전제이지만-종교적 배타성이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이는 그도 아니다.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신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불신의 세상에서는 밥도 안 먹고 숨도 안 쉬고 불신자와는 상종도 않고 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작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은 그런 편견과 독선-필자 본인은 무지라 생각하지만-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런 유혹을 극복하고 참된 언어와 삶을 구사할 때 훨씬 더 돋보이게 될 것이다.
숫자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고김추기경의 선종은 한국 카토릭 역사상 그 어떤 선교대회 보다도 더 많은 실질전도와 잠재전도의 효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언젠가 뭘 믿어도 믿으면 성당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심어주지 아니 했을까 싶다. 좀 더 큰 맘 먹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꼭 그와 같다’ 하면 난리가 날까? 한국 교회 안에 신 불신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칭송듣는 목사님이 몇이라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교회는 얼른 보아도 너무 야비하고 거칠고 세속적이다. 너무 탐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다. 교회가 진정으로 일반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은근히 존경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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