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2.
 서울성락교회 왜 개혁을 논하는가?
글쓴이: 이동훈  날짜: 2010.09.12. 17:05:03   글쓴이IP: 220.92.9.60
서울성락교회 왜 개혁을 논하는가?
이동훈 목사(부산성락교회 담임)

들어가는 말
개혁은 낭만적이지 않다. 그런 개혁은 없었다. 매년 10월 30일은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질의문을 부착하므로 16C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 것을 기념하는 종교개혁 기념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에 이르러는 그야말로 기념일이 되고 말았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한국교회가 일반의 매력을 상실하고 소리 소문없이 불교에 밀리고 천주교회에 밀려도 여전히 초대형의 교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아직은 살만하기 때문이다. 원래 어떤 종류의 ism이든 먼저 절박한 현실이 있었다. 그리고 점차 여유를 찾으며 그것은 교리가 되고 이념이 되고 사상으로 발전되어갔다. 16C 종교개혁역시 신학이나 교리가 먼저 아니었다. 회중들은 피폐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기념비적 성당들은 계속 세워져 갔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성베드로 성당건축이 그것이었다. 무리한 성전건축으로 곳간이 비자 성전세를 독려하고 성직을 매직하더니 마침내 기상천외하게 면죄부 판매라는 아이디어까지 나왔다. ‘당신 전대에 있는 금전이 헌금궤 안에 땡그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당신이 효도를 다하지 못했던 부모님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질 것이오.’ ‘당신의 사랑했던 아내, 남편 역시 그렇게 옮겨 질 것이오.’라는 것이었다. 신앙양심은 훼손되고 영혼이 죽어가고 있었다. 목숨을 담보한 투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자, 우리 어떻게 교회를 한번 개혁 해볼까? 어디서부터 시작하지’하는 그런 낭만이 아니었다. 16C 종교개혁과 21C 종교개혁의 논의는 이점에서 차이난다.

1. 서울성락교회, 한국교회 그리고 세계교회
1)개혁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만일 서울성락교회가 개혁에의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향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자기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빠뜨릴 수 없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지만 그래야 정당하다. 나는 이상 없고 당신 눈의 티끌만을 시비하면 괜히 조롱거리만 된다. 서울성락교회의 위상과 규모 더하여 시무언의 위상을 감안하면 이미 오래전에 서울성락교회는 한국교회를 논하고 세계교회의 장래를 논할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점 교회개혁에 대한 논의는 논의자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그것이 주님의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서울성락교회는 근본적으로 교회개혁의 성격이 강한 베뢰아운동의 모태교회이다 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그것은 한국교회를 거쳐 세계교회까지를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늘 거대 담론에는 함정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지만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큰 담론이다. 종교개혁은 현생 인류의 역사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의 하나이다. 종교개혁으로부터 현대가 시작되었다고 까지 한다. 그런 의미 그것은 지난 역사를 등에 지고 앞으로 다가올 수세기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성락교회는 적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욕도 그렇지만 베뢰아운동의 중요성과 본질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기독교회는 예수께서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말씀같이 전에 없던 무신(無信)함의 위기에 몰려있다. 대표적이고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인 영국에서조차 ‘만들어진 신’의 도킨스의 도전에 이어 근자는 세계적 우주 물리학자 호킹의 ‘위대한 설계’에서〈창조하지 않는 신〉의 개념이 나와 종교와 과학의 논쟁에 불을 붙였다.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기독교회가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과학의 도전 앞에서 서울성락교회는 교회의 미래가 어떠해야 될 것에 대해 독자적으로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세계 기독교회를 근원적으로 새롭게 하는 일에 분명한 역할이 있음직하다.
2.개혁 이해
1)개혁의 두 방향
일반적으로 개혁은 내부의 반성에 의한 자발적 변신이 있고, 외부의 급격한 요구에 따른 혁명적 충격이 있다. 종교개혁을 전자로 분다면 프랑스혁명은 후자적 성격이 강하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사제였던 루터에 의해 봉기되었으나 이미 그 이전부터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충분히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고, 진행과정에서도 정치적 이해집단과 상당부분 연결되어 있었던 점에서 순수한 내부적 반성으로 보기만 어려운 점도 있다. 문제는 장기적으로 그리고 바람직한 방향에서 볼 때 개혁은 위로부터의 기획된 개혁이 아니라 내부에서 그것도 아래로부터의 분출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어야 역사개혁의 진정한 힘이 될 수 있다. 섣불리 기획된 개혁은 생명력이 약하여 오래 가지 못한다.
2)개혁에 대한 저항
개혁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보통 그것은 현실에 대한 안주를 거부하고 옳다고 확신하는 이상을 향해 거부할 수 없는 부담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그것은 심한 저항을 수반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역사는 발전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체계이다. 저항에 부딪쳐 힘들어 할 때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이 결여되면 현장에서는 현실 안주 내지는 회고, 복고적 경향의 다른 소리들이 나오게 된다. 다양한 이유를 들어 개혁에 대한 거부조건들을 제시한다. 이렇게 시대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세력이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3.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개혁의 기준에 대한 성찰과 함께 무엇이 기준이 되어 어디로 어떤 모습으로 개혁하려 하는가? 기준은 성경이다. 베뢰아운동이 성경닮기를 표방하는 것은 기실인즉 16C 종교개혁과 맥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도 모든 기독교운동은 성경으로 돌아가고 성경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면 그 성경 앞에 높여있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 비춰진 타인의 모습이 아니라 성경에 비친 바로 자신의 모습이자 우리교회여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1.) 성경을 닮지 않은 자신이다. 이것이 개혁의 출발점이다. 개혁은 자기 비판적일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받는다. 그래야 정당하고 실패하지 않는다. 평소 늘어놓았던 자신의 말과 글 그리고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 첫째 대상이다.
2.) 평신도운동이다. 평신도운동이라는 말은 대단히 비 종교개혁적 단어이다. 그 말 속에는 성직계급이 전제되어있다. 16C 종교개혁은 부패할 데로 부패한 당시 로마교회에 대한 신성한 도전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탐구했고 성경에 근거하여 만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만인제사장론을 펼쳤다. 서울성락교회는 그런 점에서 대단히 성공한 교회였다. 서울성락교회의 발전사가 이를 증거한다. 은혜로 충만하게 무장된 열심쟁이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교회는 힘이 넘쳤다. 그로 많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에 의해 세계로 복음이 확산되었다. 그들은 애초 외교관, 상사 주재원, 간호사, 그리고 파견 근로자들과 유학생이었고 그들의 친구요 남편과 아내였다. 그들이 복음을 전했고 어울려 교회를 세웠다. 서울성락교회가 침례교회를 표방한 것도 배경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비슷한 맥락이다. 감독정치를 하는 감리교회나 장로정치를 하는 장로교회와 달리, 침례교회는 전통적으로 회중정치를 표방한다. 그러나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애초의 평신도 운동은 상당부분 약화되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기존의 직업을 포기하고 신학을 하고 안수를 받음으로 성직자 계급에 편입되었다. 이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이는 역사의 필연적 한계일수도 있으나 최소한 그런 정신을 계승하려는 운동과 제도화의 공론이 이어져야 했다고는 지적할 수 있다. 기존의 교회체계에 저항하며 오직 성령에 의한 감동과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했던 풍속들이 급속하게 쇠잔하여 갔다고 하면 지나친 자기 경계일까. 거대한 예배당만큼 이미 교회 안에 여러 성직 계급들이 등장하여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되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해 보는 것이다. 서울성락교회는 대표적으로 핍박받는 교회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핍박에도 무관한 교회가 되었다. 그사이 성직계급이 강화되고 평신도운동은 약화 되었다.
3.)거룩한 증거와 능력사역. 서울성락교회의 트레이드마크는 누가 뭐래도 ‘귀신 쫓는 교회’이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서울성락교회로 대표되는 베뢰아운동은 귀신 쫓는 사역 외에도 성경에 밝고 영의 세계에 대하여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열심이 대단한 것도 빠뜨릴 수없다. 그중에 으뜸은 역시 능력사역을 지향하는 교회이다 는 것이다. 짧은 기간에 성경을 여러 번 읽은 청년 김기동에게서 능력이 나타나 죽은 자를 살리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간증은 교리에 찌들고, 신학에는 밝으나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없었던 기성의 교인들에게 맑은 하늘에 벼락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시무언이 평생에 걸쳐 쏟아낸 엄청난 분량의 글들에 담겨있는 간증과 체험과 믿음의 고백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자칫 시무언의 사역이 전설이 될 위기에 놓였다. 사람은 이 같은 신유와 능력부재현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더 깊은 경륜과 계획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님 이렇게 의료혜택이 넘치는 세상에서 믿음이 이전만 같지 못하여서 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능력사역은 여기까지다 라고 선언해야 할까? 그것은 아닐 것 같다는 사실이다. 능력을 사모하고 능력을 자랑하였으나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시무언같이 간장이 끊어지도록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개혁의 대상이어야 한다. 화석화된 한국교회, 세속화된 세계교회에 대한 비판은 후에 하여도 충분하다.
4.) 베뢰아라는 우월주의, 폐쇄주의. ‘서울성락교회는 여러모로 대단한 교회이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정확히는 시무언 김기동목사라는 개인이 대단하다고 해야 더 옳은 말이지 않을까싶다. 서울성락교회의 위상과 오늘에 이르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기록들은 주지하는 바 시무언의 초자연적 인내와 노력과 탁월함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물론 여기서 협력자들, 수많은 부목사들과 더 많은 여전도사들, 그리고 또 더 많은 목양사들과 무명의 일반교인들의 수고를 모르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그렇게 우월해 할 것 없다. 그것은 유치하다. 그러나 상당부분 베뢰아라는 우월주의에 빠져있어 보인다. 그렇게 사는 것도 그만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사정없이 비판하는 정통신학에 대하여 그만한 신학적 소양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몇 마디로 폄하해 버린다. 베뢰아에 대한 자부심은 핍박받는 베뢰아인들의 뒷심이요 생존의 근거인 것이 분명하다. 베뢰아가 자랑스러워도 지나친 자부심과 폐쇄주의는 어느 면으로도 기독교적이 아니다. 세계도처에는 정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기독교적 삶, 그들의 능력, 그들의 헌신이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에도 주님의 이름에 큰 영광이 돌아가게 했다. 많이 알고, 깊이 알고, 더 많이 이해했다 할지라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다.
나가는 말
개혁자들은 애초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거침돌이 너무 많았다. 그것들을 걷어내기 위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려는 투지만이 남아 그들의 개혁을 유지시켰다. 소유와 확장은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힘이 아니다. 개혁논의의 요체는 간단하다. 서울성락교회 앞을 지나는 이가 그리고 교회를 방문한 이가 자연스럽게 중세 거대성당을 연상한다면 서울성락교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천막집회를 전전했던 시무언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개혁논의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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