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1.
 목회를 위한 신학 제언
글쓴이: 이동훈  날짜: 2009.01.09. 10:34:55   글쓴이IP: 58.235.179.56
이동훈 고신대학 및 신학대학원(M. Div) 졸업·Canada Christian College(M. Div., D. Min.)


1. 들어가는 글

목회와 신학의 관계라. 목회는 무엇이며 신학은 또 무엇이든가. 그 답은 ‘목회와 신학’이라는 그 둘이 어떤 관계에 있으며 또 어떤 형태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겠는가 하는 원론적 질문에서부터, 교회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목회 현장의 작은 항목에까지 교회와 관련된 전부를 포괄한다. 따라서 이는 애당초 졸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단지 필자는 졸고를 통해 베뢰아 교회라는 다소 제한되고 특수한 목회 현장을 염두에 두고 ‘목회와 신학’의 일반적 관계에서 출발하여 베뢰아 목회의 바람직한 신학적 요구까지로 제한하여 주어진 소임을 감당하려 한다.


2. 목회와 신학

흔히 목회와 신학의 관계를 시사적으로 표현하여 ‘신학이 있는 목회, 목회가 있는 신학’이라고도 하나 이는 괜히 말만 그럴듯할 뿐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 목회와 신학 둘의 원론적 관계는 ‘신학이 있는 목회, 목회를 위한 신학’이다. 다소 개인적 소신이 개입된 감이 없지 않지만 신학적으로도 크게 틀리지 않다. 먼저 둘의 초보적 개념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둘 사이는 어떤 관계이며 또 어떻게 발전해 가야 할지 둘의 관계를 구성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목회는 교회의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 속에 있는 교인들에게 일러주고 양육하는 일체의 행위이다. 겉보기엔 사람이 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배후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시무언은 “목회란 세상에 있는 직업 중에 최고의 직분이며 최대의 업무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세상에 옮겨 놓으려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세상에 그 뜻을 정착시키려는 일이다.”1)라고 정의한다.
목회 그 이외의 일들은 모두 세상에 속한 일로, 세상에 속한 사람의 뜻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지만 목회는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 세상의 일은 세상에 속한 것이므로 영원한 소망과 무관하며 하늘의 위로도 없고, 상급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세상의 법칙에 따라 이 세상에 속한 지혜와 지식으로 만들어져간다. 고로 거기는 신령한 요소가 없다. 그러나 목회는 근원적으로 하늘에 속한 것이 땅 아래로 내려온 것이므로 신령하다.
반면 신학은 신과 그가 하시는 일에 관한 학문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를 변증하고 가르치고 전하는 일체의 사고와 행위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리 정돈되어진다. 신학이 신학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신학을 제공하는 텍스트(text)로서의 성경에 대하여 바르고 해박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텍스트(text)에서 의미를 도출해내는 해석학의 문제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곁들여 교회 공동체가 실존하는 정황으로서, 컨텍스트(context)에 대하여 바르고 폭넓은 식견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목회와 신학은 서로 밀고 당기며 교회를 이루어간다.

2.1.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

목회는 그리스도가 친히 권고 하시고 명령하신 사역이다. 목회 역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는 기독교 신학의 원론을 초월하지 않는다.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하셨으니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하듯 목회도 더욱 그리해야 한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은 흔히 가서 제자 삼고 전도하라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말씀이다. 특히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오르실 때 남기신 최고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이 소중한 말씀 안에 목회의 핵심이 들어 있다.

① 목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거하여,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② ‘가서’: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그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이, 또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들이 그의 부모와 업을 다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따라나섰던 것 같이, 자신의 사명을 따라 땅 끝까지 가야 한다.
③ ‘모든 족속을 제자삼아’: 목회는 동서남북 땅 끝까지 모든 족속들을, 남녀노소, 문명인, 미개인을 불문하고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든 가서 그들을 제자 삼는 일이다.
④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는 교회의 임무이자 사명이며, 목회자의 임무 중 하나인 교육과 관련된 일체를 말하는 것이다.
⑤ ‘침례를 주고’: 침례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이요, 기독교회의 거룩한 순종이다. 그 근원이 교황권으로 말미암은 ‘세례’를 ‘침례’로 바꾸는 일은 정치적·교리적 논쟁을 떠나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 것이냐 말 것이냐라는 보다 원론적 태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주께서 명하신 이 말씀 일체가 목회의 전형(全形)을 이룬다.

2.2. 그리스도 삼중직과의 관계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라고 하신 말씀처럼,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약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한다. 구약성경시대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세 직분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러한 구약의 세 직분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이 기독교회의 고백이다. 이에 대하여 이론(異論)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교회의 일반적 전승은 구약시대 세 직분의 유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한다. 곧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 되심으로 이전 시대 세 직분의 불완전함을 다 성취시키셨다. 이와 동일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과 제자들과 목사의 사역도 그리스도 삼중직으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하다. 이러한 이해는 목회가 곧잘 세상의 형편을 따라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시대의 방향을 제시하는 방향타 역할을 하게 한다.

① 선지자로서의 역할: 예수는 선지자로서 인간과 교제하는 하나님을 대표한다. 선지자를 지칭하는 구약의 용어는 ‘나비,’() ‘로에,’() ‘호제’()의 세 가지이다. 이들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프로’()와 ‘페미’()의 복합어인 ‘프로페테스()’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전치사 프로는 시간적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말하다’라기 보다 ‘말을 발하다’(speak forth)를 의미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선지자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발하는 자이다. 좀 더 의미를 확장하면 사물을 직시하는 자,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일(특히 하나님의 사자로서)에 종사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를 말한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자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와 유사하다.2)
② 제사장으로서의 역할: 제사장과 선지자 둘 다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 둘은 그 역할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선지자는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의 뜻을 해석하고 전달하도록 임명된 반면,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표한다. 그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기꺼이 하나님께 나아가 백성들의 편에서 그들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특권을 가졌다. 선지자들이 윤리적·영적인 의무, 책임, 특권을 강조하였다면 제사장은 하나님께 올바르게 나아가기 위한 의식(제사)의 준행을 강조했다. 그는 직접 그 의식의 전면에 서 있었다. 히브리서 5장 1절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1절에 나타난 제사장의 위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 대표자로 선택되었다.
둘째, 제사장은 하나님이 임명하셨다.
셋째, 제사장은 하나님께 속한 일을 인간을 위해 수행한다.
넷째, 그의 특별한 일은 속죄를 위해 헌물과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다섯째, 백성을 위해 중보하는 기도를 하고 축복했다.

위와 같이 오늘날 목회의 상당부분이 구약시대 제사장의 역할과 유사하다. 목회자는 많은 때에 성도들을 위해 그들에 앞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 예로 목회자의 중보기도가 대표적이다.

③ 왕으로서의 역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삼위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신다. 그의 보좌는 하늘에 세워졌고 그의 나라는 만유를 통치한다. 여기 그리스도의 왕직은 세상 나라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왕국, 곧 그의 백성과 교회에 대한 통치를 의미한다. 그것은 영적 왕국의 영적 왕직으로 신자들의 심령과 생활 속에 정립된 중보의 통치권이다. 이 왕직은 교회의 회집권, 교회 정치, 성도들의 인도와 보호 속에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 반복해서 호칭되는 것으로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삼중직의 위임이라는 구도는 목회의 성격을 잘 규정해 준다.

2.3. 목양과의 유비

목회란 ‘무리를 친다’는 뜻이다. 이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낙향한 베드로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먼저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하고 세 번이나 거듭 물으신다. 목회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목회는 먼저 주님을 사랑함에서 시작된다. 주를 사랑함보다 앞서는 것은 절도요 강도다. 어떤 다른 조건도 확인하지 않고 주님에 대한 사랑만을 세 번이나 거듭하여 물으신 것은 그것의 막중함과 근본 요건의 어떠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는 표현을 약간씩 달리하며 말씀하셨다.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주고 받은 ‘사랑하느냐’와 ‘사랑합니다’의 헬라어 원어와 예수께서 ‘양을 먹이라’ 하신 말씀이 조금씩 달리 쓰인 표현3)까지를 포함해서, 본문은 신약교회 목회의 함축적 전형을 보여준다.
목양유비의 결론은 목회이다. 이것은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첫째, 목회는 주님이 주도하시는 일이다.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베드로에게서가 아니라 그들을 찾으신 주님께서 목회를 세우셨다. 둘째, 목회의 대상은 주의 양들이다. 이는 내게 속한 나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이다. 나는 그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셋째, 목회는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다. 즉, 목회는 청지기로서 그 임무를 감당해야하는 책임이 있다.
주님이 자기에게 속한 영혼들을 양들로 표현하신 것이 중요하기에 양의 특성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요 10:11, 12) 하신 말씀은 목회의 근간이다. 계속해서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하셨다. 목자는 각 양의 습성을 잘 알아야 하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꼴과 물을 찾아 멀리 바라보아야 하고, 공격을 가하는 짐승들로부터 능히 지켜내기 위해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해야 한다. 시편 23편은 그렇게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장면이 아니다. 배후에는 양을 해하려는 원수와 지켜야 하는 목자의 치열한 영적 전투가 깔려 있다. 주님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다. 목회를 세우신 그는 마침내 그 양들을 보존하기 위해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기까지 목자의 도리를 다 하셨다. 큰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사의 제물로 드리시는 거대한 역사였다. 양과 목자의 관계야말로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를 가장 실감 나게 설정한다. 이것이 목회의 기본 원리이다.

2.4. 시무언의 목회관

시무언은 그의 25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통하여 목회와 신학에 대한 수많은 언급을 해왔다. 그의 노작들은 책상머리에서 나온 단순한 목회 이론이 아니다. 저자는 자신이 전도자로서 개척자로서 그리고 심령부흥사로서 지내온 여정을 마치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듯, 후대를 위하여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설파한다. 따라서 그의 목회 교훈들은 당장 현장 목회에 그대로 적용되어지도록 대단히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그의 노작들은 향후에도 더 깊이 연구되고 그 결과가 널리 보급되어져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그의 목회와 관련된 저서로는 『교회성장을 위한 목회실천원리』와 『목사학』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으나 이는 너무 형식적으로만 본 것이다. 그는 그의 저서 250권 중 상당 부분에서 목회에 대한 그의 지론을 쏟아내고 있다. 졸고는 시무언의 목회관 중 필자의 관심을 끄는 지극히 제한된 두 가지만을 취사선택하였다.
그는 그의 『목회실천원리』 중 ‘제2장 목회’에서 무려 25-93페이지까지 그리고, 다시 ‘3장 목회자’라는 장에서 97-149페이지까지 ‘목회’의 개념 및 목회의 원론에 대하여 많은 양의 서술을 하고 있다. 이를 다 소개할 수 없어 소제목만을 인용한다.

제2장 목회 제3장 목회자
1. 하나님의 일 1. 하나님을 아는 자
2. 주 예수의 일 2.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
3. 성령의 일 3. 하나님께 계시를 받는 자
4. 양 무리를 치는 일 4. 하나님의 지혜의 대리자
5. 예수께서 부활하신 일 5. 하나님의 지식의 대리자
6. 새 가족을 돌보는 일 6. 하나님의 능력의 대리자
7. 목회자 자신의 일 7. 공적신분을 가진 자
8. 행동으로 하는 일

이는 다시 그의 『목사학』에서 이어진다.

제1장 목회란
제2장 목사학은 목자학이다.
제3장 목자와 목사는 모형과 실상이다.
제4장 목자와 목사의 성격

시무언은 특히 ‘제5장 시편 23편에 나타난 목자상’을 설명하는데, 무려 75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그는 철저하게 목사를 구약 시대의 목자와의 유비에서 그리고 목회를 목양과의 유비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그의 목회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는 이를 위해 극한의 희생과 전문성, 성실성, 주인에 대한 충성 등이 필요함을 지적한다. 둘째, 그의 목회관에서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목회는 천재직이다.’라고 한다는 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나 할 수 있다고 덤벼들어도 아니 되고 남이 하고 있는 목회를 이러쿵저러쿵 비판해서도 안 된다. … 목회는 세상에 있는 어떤 직분보다도 힘이 드는 중요한 직분이다. 인간의 지혜만으로 할 수 있다거나 세상에 주어진 조건만으로 능히 할 수 있는 세상 일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상의 없이는 불가능하며 하나님 손길이 직접 와 닿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 목회이다.4)

이외에도 그는 수많은 곳에서 목회가 얼마나 탁월한 능력을 필요로 하고 극한의 절제와 노력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역설한다. 그의 목회와 삶 전체가 그의 역설만큼이나 최고를 지향하고 천재성을 지향했다는 것도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그에게 있어 목회는 그만큼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었다. 이는 오늘날 준비되지 않은 많은 이들이 너무도 쉽게 목회에 뛰어드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 같은 그의 ‘천재성’ 논리는 ‘목회가 무엇이다.’라고 말할 정도의 경륜을 가진 이들의 깊은 공감과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천재성’ 이론은 그의 목회에 대한 신중한 인식을 가늠케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의로 제자들을 불러 선택하시고 기독교 역사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사람을 들어 쓰시고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사실과는 조화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시무언이 강조하는 바 목회의 비중을 이해하고 그것이 목회의 진실이라 할지라도 목회는 하나님께 연유함으로 인해 사람의 천재성과 노력은 숨겨지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2.5. 목회와 신학의 관계

그러면 목회와 신학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파격적으로 말한다면, 둘은 동전의 서로 다른 양면이다. 무엇보다도 신학이 있어야 목회가 가능하다. 기독교 구원의 신학이 있어야 회심이 가능하고 구원의 감격이 가능하고 그 터전에서 다시 신학이 나온다. 이렇게 파생된 신학이 목회를 지원하고 견제한다. 이후부터 목회와 신학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조화, 균형, 발전 그리고 위기와 갈등을 되풀이 한다. 현대교회가 지니고 있는 어려움을 거론하는 중에는 꼭 목회현장과 신학 교육의 괴리가 지적된다. 신학과 목회가 따로 논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가 없이 신학이 있을 수 없고 신학이 없는 목회를 그려볼 수 없다.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신학이 뒷받침되지 않는 목회는 목회자 개인의 지식과 경험에만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 균형 잡힌 목회가 어렵다. 혹 일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어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걸러진 신학의 도움과 신학에 대한 이해와 깊이가 없으면 목회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판단하기 곤란하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이같이 목회와 신학이 균형과 조화, 상호 견제와 보완이라는 관계를 유지하지 못함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사례가 부지기수이다. 신학은 목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해야 하며, 목회가 현장에서 고민하는 것을 취합하여 답을 제공하고 목회의 성격을 규정하며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신학의 존재 의미는 그것이 목회를 위하여 사용될 때만 살아있다. 그러나 많은 시간 목회가 없는 신학이 있었다. 교회라는 현장이 없는 신학이었다. 그것은 신학의 자기도취에 지나지 않고 더 이상 신학으로서 존재할 근거도 가치도 힘도 없는 것이다.
신학이 없는 목회도 마찬가지다. 사례를 들어보면 훨씬 이해가 쉽다. 한때 국내교회들은 물론 한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든 큰 영향을 미쳤던 이장림 목사의 휴거 열풍이 좋은 예다. 최근 국내에서 대단한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도 마찬가지다. 공교한 이론으로 무장한 듯하지만 종합적이고 균형잡힌 신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으면 이들이 의도하는 바를 쉽게 찾을 수 있고 숨어 있는 논리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둘은 상생의 위치에 있으면서 동시에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목회는 신학의 과제를 제시하고 신학을 실현한다. 그렇게 탄생한 신학은 다시 목회를 규정하고 도와준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끌면 그 자체가 함정이 된다. 목회도 신학도 항상 서로에게 협력과 견제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상기 살펴 본 바와 같이 목회와 신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둘은 단순히 조화, 보완하는 관계를 넘어 서로에게 상승작용을 할 수 있어야 바람직하다. 목회는 목회가 우선인 것만을 주장하면 현실의 필요에 급급하여 자가당착에 빠지게 될 위험이 높다. 목회는 신학에 의하여 점검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그때 목회의 건전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목회의 호황기 일수록 신학이라는 제동장치가 작동하므로 목회의 과거를 평가하고 현실을 진단하며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신학이 제공하는 현 상황에 대한 풍부한 진단과 과제와 연구업적은 목회의 신선도를 지켜주는 에너지가 된다.
그런가 하면 신학은 늘 목회를 의식해야 한다. 목회가 없으면 신학이 없다. 신학은 목회를 진단하고 평가하는 것을 넘어 목회를 위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측면이 있다. 신학의 기능이 목회를 위하여 작동할 때 둘은 공존할 수 있다. 둘이 긴장을 유지하며 상승 발전하지 않으면 공멸할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이 같은 상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목회는 신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고 신학은 목회라는 현장의 경험을 요구한다.


3. 월간 『목회와 신학』

목회와 신학을 거론하면서 월간 『목회와 신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저널로서의 목회와 신학은 목회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선 교회의 몫이다. 그러나 『목회와 신학』은 현장의 교회를 위하여 목회를 조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다시 목회를 점검하면서, 개교회가 쉽게 할 수 없는 현장의 제반문제들을 짚어주고 걸러주고 확인해준다. 때로는 과거를 돌아보고 때로는 현실을 비판하고 점검하며 미래를 예시하는 것까지, 대단히 폭넓은 균형타 역할을 한다. 저널이 가지고 있는 상업성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이도 유관한 교회의 도움 때문인지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신학의 균형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신학적 입장을 떠난 신앙의 유형이 있을 수 없고 목회가 있을 수 없음을 감안한다면, 열린 자세와 객관적인 연구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부득이한 한계는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창립 이후 『목회와 신학』이 걸어 온 과정을 보면 그간 한국교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왔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특별히 매 호의 특집 기사는 시대의 과제와 사명을 포함하여 교회 현장의 다양한 문제를 망라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2000년부터 2003년까지와 2008년의 특집 기사의 주제이다. 위 기간은 무작위로 선택된 것이다.

2000년 특집 (아래 숫자는 월 표시)
1.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2. 교회 안의 우울증, 어떻게 할 것인가
3.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대한 신학적 조명
4. 성경적 교회관을 회복하자
5. 교회 안의 이론, 어떻게 할 것인가
6. 목회자를 노리는 성적 유혹의 덫
7. 청소년 사역이 최전방이다
8. 성경적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9. 율법주의 아래 있는 교회
10. 한국교회와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
11. 성령의 시대와 교회 공동체
12. 목회자의 탈진, 어떻게 할 것인가

2001년 특집
1. 문화전쟁 시대의 교회
2. 고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3. 안식일에서 주일성수까지
4. 복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목회
5. 우울증 성도, 어떻게 도와야 할까
6. 사이버상의 소돔성, 웹 포르노 문제
7. 설교, 그 위대한 능력을 회복하라
8. 복음서간의 차이, 어떻게 볼 것인가
9. 이혼문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10. 주님의 공동체를 세우십시오
11. 장로직의 세속화와 한국교회
12. 목회자의 영적 침체, 어떻게 할 것인가

2002년 특집
1. 기독교의 탈 서구화와 신학의 방향
2. 교회를 세우는 목회 리더십에 도전하라
3. 도시의 신학과 목회적 대응
4. 한국교회와 교회개척의 소명
5. 이 땅에서 목회자의 아내로 산다는 것은
6. 교회는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7. 목회자를 위한 우정의 신학과 삶
8. 복음은 왜 우리에게 선교를 요구하나
9. 설교의 세계를 여는 성경해석에 도전하라
10. 교회여, 다시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11. 우리시대를 위한 기도의 신학과 삶
12. 인류의 소망,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자

2003년 특집
1. 목회소명의 회복과 한국교회
2. 한국교회를 위한 셀과 소그룹 목회
3. 하나님의 인도하심, 어떻게 봐야 하나
4. 부활의 아침과 복음의 영광
5. 패밀리 목회 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6. 전쟁의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과제
7. 한국교회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하나
8. 마음을 치유하는 목회로 나아가라
9. 교회의 소명과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
10. 참된 부흥 1. 다시 성경이다
11. 참된 부흥 2. 다시 눈물의 회개입니다
12. 2003년의 사회변동과 2004년의 목회가이드

2008년 특집
1. 반기독교 세력을 극복하라
2. 우리사회의 新이웃사촌 5)
3. 새 정부의 리더십과 한국교회
4.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1
5.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2
6. 포스트모던 시대의 新교회론 1: 이머징 교회
7. 정직한 한국교회
8. 포스트모던 시대의 新교회론 2: 마케팅 교회
9. 모바일 목회
10. 농어촌을 변화시키는 생명목회
11. 윌로크릭 변화의 핵심: 맞춤 양육

이상에서 살펴본 그대로 『목회와 신학』을 다시 정리해보면,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전 영역에 대한 목회적 요구에 민감하다. 둘째, 교회 안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상당한 정도로 현실 문제에 대하여 지평이 열려 있다. 사회의 현안에 대하여 교회적 대안을 찾으려 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셋째, 대중성을 유지하면서도 수준을 지키고 있다. 교회의 현실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높은 지성을 포괄하려는 노력이 다분하다. 넷째, 교회와 사회의 미래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 다섯째, 교회를 지키려 하면서도 일방적으로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일언하여 교회를 위하면서도 목회와 신학의 긴장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4. 성장하는 목회의 특징

성장이 목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라지만 어떤 식으로든 과소평가 할 수 없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현실이다. 성장하는 목회의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고 짧게라도 이에 대한 평가를 곁들여 보는 것은 목회와 신학의 관계가 어떠해야 할까를 모색함에 유익할 것으로 판단된다. 더하여 베뢰아 교회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기존의 신학을 평가하고 베뢰아 목회의 차별화를 감안한 목회를 목회되게 하는 콘텐츠(contents)로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를 살펴본다.
교회란 목회와 신학의 합성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하는 교회는 성장 잠재력을 지닌 목회적 동력(리더십, 지리적·인적 환경 등)과 앞서 살펴본 ‘목회를 위한 신학’의 합작품이다. 여기서 다시 목회와 신학이라는 두 축에 성장이라는 관계어가 연결되어 있다. 성장하지 않는 목회는 어느 날 더 이상 목회가 아닌 지경에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장은 교회의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성장은 그 어감(語感)이 야기하는 여러 비판적 지적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없을 수 없다. 그럼 성장하는 목회에는 어떤 신학적 특징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4.1. 강력한 리더십

졸고에서 본격적인 교회 안의 리더십에 대한 논의는 비껴간다. 강력한 리더십의 ‘강력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힌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때로 리더십과 관련하여 ‘강력한’은 곧잘 ‘일방적,’ ‘독재적,’ ‘무리한’ 정도로 이해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교회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도출해 내는 지도력 정도로 이해한다. 이 또한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일단 긍정적이고 합리적이며 진정성이 있는 리더십이다. 파괴적이지 않고 생산적이며 독선적·강제적이지 않으면서도 목양의 비유에서와 같이 양을 이끌 수 있고, 양이 따를 수 있는 정서와 지식과 교양, 덕과 힘과 실력을 갖춘 리더십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어 탈이긴 하지만, ‘목회자의 리더십만큼 교회가 클 수 있다’는 의미의 리더십이다.

4.2. 성령의 은사

20세기 초 일기 시작한 방언을 중심으로 한 은사운동은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등의 교회 성장 학자들에 의해 ‘능력사역’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은사 - 방언과 예언, 신유, 축사(逐邪) 등을 통칭한 용어로서 - 를 중시하는 목회 유형을 낳았다. 이후 성장하는 교회는 세계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강력한 ‘은사운동,’ ‘성령운동,’ ‘기도운동’을 견인하였다. 이는 오순절교회만의 현상도 아니다. 개혁교회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회로 확산되었고 심지어 로마 가톨릭교회 안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사도행전적이라는 점에서 성경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성령의 은사와 표적이야말로 가장 분명하게 전하는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신앙의 진정성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더하여 100년 이상 계속된 오순절운동을 지켜본 결산적 시각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지적을 하고자 한다. 사회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은사운동이라는 성령운동의 목회적 성격은 말씀과 교리중심의 이성적·합리적·논쟁적 분위기에 비하여 감성적·모성적·포용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즉 20세기 초의 오순절적 성령운동은 부성적 혹은 가부장적 형태가 강했던 장구한 기독교 역사에 묻혀 있었으나, 사실은 언제나 기독교 역사의 기저로 존재하던 신앙의 모성적·감성적 측면이 용암이 터지듯 역사의 전면에 분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면만 강조하던 시대에 비해 양면이 함께 표출되므로 경쟁력이 배가 된 것은 당연지사이다. 더욱 모성적 포용력과 감성적 표출의 힘이 지난날의 부성과 이성에 대한 보조적 성격을 넘어 신앙의 주력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옳고 그름의 시비를 따지고 논쟁하고 정죄하던 분위기에서 상처를 보듬어 끌어안고 눈물을 씻어주고, 한과 슬픔을 표출할 수 있는 정서가 더하여졌다. 교회는 이전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분리보다 성령의 용광로 안에서 용해되어지는 끌어안음의 기능이 확산되므로 성장에 불이 붙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단순히 기도하던 무리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 정도가 아니라 확산의 과정에는 사회학적 현상이 플러스 알파가 되었던 것이다. 목회라는 현상의 배후에는 이렇게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신학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신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목회의 성격이 달라진다.

4.3. 회중의 자발적 참여

성령운동은 은사 충만의 역사만이 아니다. 성령운동은 그 감성과 포용성으로 인해 성도들의 뜨겁고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이는 곧 16세기 종교개혁의 한 축이 되었던 ‘만인제사장론’과도 무관하지 않다. 교역자라는 전문 사역자가 독점하는 목회 형태는 이제 거의 불구에 가까운 목회 형태라는 것이 정설이다. 중세교회는 성직자 계급이 주도하는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성장하는 교회는 강력한 리더십 아래 개미 군단이 일체로 움직여 교회를 이끈다. 이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자발성은 교회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어낼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건비 절감의 효과를 가져다준다. 이렇게 절약된 교회의 재화는 교회의 필요를 따라 보다 더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유를 창출한다. 그러나 참여를 불허하는 신학에서는 실제적인 참여가 나오지 않을 뿐더러 파생되는 유익도 없다. 현대교회의 참여 모드는 우연이 아니라, 성직자 계급의 비움과 평신도 그룹의 참여를 유도하는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신학의 결과이다.

4.4. 전 인격적 훈련

오늘자(2008. 11. 18) 주요 일간지와 KBS가, 최근「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한 ‘2008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여기서 성인남녀의 경우 10명 중 2명도 채 안 되는 사람 (18.0%)만이 교회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불교가 31.1%, 가톨릭이 35.2%인 것에 비해 절반 수준이다. ‘어찌 이런 결과가!’ 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사필귀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지극히 염려되는 대목이다. 지난 수십 년간 교회가 큰 폭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호황의 나락에 빠져 정작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소망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드러난 삶만을 본다. 그래서 예수께서 직접 ‘빛과 소금이 되라.’ 말씀하셨던 것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주도하여 성령의 은사에 의한 교회 성장 운동이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과 달리 이렇게 어두운 면이 내부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전인격적 삶은 그리스도인 자신에게는 상벌의 문제이지만 복음 전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 보고서는 ‘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일치 문제’(42%)를 가장 먼저 바꾸어야할 교회의 모습으로 지적했다. 열심히 해야 할 사회 활동으로는 구제 활동(47.6%)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얼마나 교회가 이 사회 앞에 정직하지 못하였으며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보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全) 인격적 삶의 훈련이 중요한 것은 성경의 구조에서도 알 수 있다.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그의 말씀이다. 이는 그가 누구인가를 보여준다. 누구든지 저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 사복음서의 기록 목적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이다. 승천 이후 성령이 임하셔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져가는 교회 행전이다. 이어 로마서는 복음의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놓았다. 그 다음부터 계시록까지의 서신서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문제이다. 즉 교회 안팎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야 하는지가 나와 있다. 어려울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순서이다. 때로 자유케하는 진리 대신에 화석화되고 도덕과 윤리로 점철된 교회가 복음의 역동성을 가로막는 것으로 인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책임을 잊고 있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언필칭(言必稱)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세상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높은 수준의 윤리적 삶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명실상부 지역사회에서 최고의 삶을 보여줄 수 있다면, 또한 그것이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의 시각이라면, 별 요란한 이벤트를 벌리지 않아도 교회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5. 베뢰아 목회를 위한 신학의 실제

성장하는 목회의 연장에서 베뢰아 목회의 현장으로 돌아가 본다. 베뢰아 목회는 어떤 신학의 지원을 받아야 하고 신학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관건이다. 베뢰아 목회의 기초는 베뢰아운동이며, 베뢰아운동의 근간은 환언(還言)운동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지나치게 원론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이는 베뢰아 목회를 가장 잘 드러낸다. 그것은 오늘의 교회가 얼마나 성경으로부터 이탈되어 있는가를 고발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시대로부터 개혁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 당시 개혁이 불완전하기도 하였거니와 - 종교개혁 이후 다시 400년이 더 지나면서, 교회는 성경으로부터 너무 많이 떨어져 나갔다는 진단이 나온다. 베뢰아 목회는 환언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5.1.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신앙생활

베뢰아 목회의 특수성은 ‘하나님의 의도 신학’이라는 고유한 신학에 근거한다. 그렇지 않다면 애써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이라는 별도의 교단을 형성할 필요가 없었다. 베뢰아운동의 신학적 기조가 바로 하나님의 의도이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이라는 것으로 규범화된다. 물론 이 같은 차별화에는 기존 신학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 있다. 베뢰아는 기존의 신학이 이방인 선교사로 살아간 바울 신학에 치중하므로 소위 구속사적 관점에 제한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인간의 관점에 제한된 것을 지적하면서 이를 뛰어넘어, 이 모두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관점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역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까지 시야를 확장시킨다. 한마디로 베뢰아 신학은 이를 기반으로 하나님의 의도 신학이라는 신본주의 신학을 구축하였다. 베뢰아 목회의 모든 것이 여기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만물을 조성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란 점에서 사실상 기독교의 근간이자 교회 생활의 설계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없는 신학과 교회 생활은 예수께서 말씀 하시는 바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 7:23)하시는 불법적이요 성경의 근거가 없는 신앙생활이다. 목사의 목회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의도라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어야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도로부터 설교가 나오고 교회 교육의 커리큘럼이 세워지고 성도들에 대한 양육과 지도의 방향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렇게 목회와 교회 생활과 교회 교육의 방향이 설정되면 세속화의 유혹으로부터 방어가 가능하고 인본주의적 신앙자세로 인한 신앙의 요동으로부터도 영혼을 보호하기에 유익하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하나님의 의도 신학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도를 기초로 한 신본주의 신앙이 목회 현장에서 기존의 신앙과 정확히 어떻게 차별화되어지는 것인지 구체적이지 않다. 개혁신학이 주창하는바 ‘하나님의 주권사상’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큰 슬로건, 또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주제와도 용어의 차이 외에 무엇이 다른가가 더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기존 신학과 다른 용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인해 불필요한 충돌을 야기하고 다른 논리나 다른 용어에 빠져 들어가는 신앙의 사변화가 초래될 수 있다. 결국 시무언이 제창한 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믿고 확신하는 것만큼의 확대와 함께 기독교 세계를 주도할 수 있을 상당한 논리를 위해 연구하고 심화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

5.2. 영적 이해

베뢰아는 시무언의 고유하고도 탁월한 성경 해석과 영적 체험으로부터 기독교 유사 이래 이 보다 더 영적일 수 없다는 평가를 받도록 일관된 영적 체계를 갖는다. ‘기독교회의 신앙이 영적이다’는 것에 이의를 다는 기독교인은, 극단적 진보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기독교 일반은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4)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로 왕래하는 모든 천사들이 영이며(히 1:14), 사람이 또한 영적 존재(창 2:7)인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눈에 드러난 역사 외에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들에게는 일관성이 없고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나 경험이 없다. 성경에 있으니 마음에 내키지는 않으나 억지로 받아들이는 격이다. 곧 ‘영적’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 자체가 근본적으로 안 되어 있다. 논리가 분명하지 않을 뿐더러 영적인 체험의 부재로 말과 논리가 분명하지 않다.
‘신앙생활이 영적이다.’는 것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하나는 가야하는 길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다른 하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오늘 목회 현장에서 목회가 방황하고 성도들의 영적 삶에 진보가 없는 것은 영적 무지에서 기인한다. 영혼을 파멸로 이끌려는 악한 영들에게 속고 있어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인간 세상의 원인과 결과로만 이해하려 한다. 이는 영에 대한 바른 지식만으로도 상당 부분 영혼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베뢰아 신학은 거의 시무언 개인의 공로로 이 모두를 일거에 해결할 설득력이 구비되어 있다. 성경 전체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인간의 허물과 구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인간 세상의 모든 재앙과 재난, 고통, 시련에 대하여 그리고 형통한 삶과 축복과 선한 영과 악한 영의 세계와 그들의 활동에 대하여, 끼워 맞추기가 아니라 일관된 이해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영에 대한 베뢰아의 이해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과 함께 베뢰아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에도 반성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베뢰아가 영적이다.’는 것이 영적이라고 구호를 외친다고 해서 영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영적 이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계속 질문되어야 하고 또 그 이해의 폭이 합목적적인가도 중요한 체크 포인트이다. ‘영적이다.’는 것이 목회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그것이 성도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확인되어야 한다. 자칫 영적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우(愚)를 범하지 않는지도 늘 경계해야 할 항목이다.

5.3. 하나님의 현존 증명

베뢰아를 베뢰아 되게 하는 힘의 세 번째는 하나님의 현재성 실현이다. 만일 이 세 번째 항목이 없다면 베뢰아는 하나님의 의도 신학이나 영적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관념의 미로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현재성’은 베뢰아를 베뢰아 되게 지켜주는 안전장치와 같다. 이는 마가복음 16장의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하신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한다. 거룩한 이적이 임하도록 기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는 사역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현존을 증명할 수 있는 강력하고도 성경적인 수단이다. 이는 또 신학 체계가 있으면 거룩한 능력이 부재하고, 성령의 능력이 현저하면 신학적 기반이 취약한 종래의 편견을 부정한다. 환언운동은 단순히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의 능력이 현재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성령의 강력하고도 거룩한 능력을 사모하고 실현하는 신앙생활은 쉴 사이 없이 충만한 영적 생활을 요구하고 이는 다시 뜨겁고도 진지한 신앙생활을 견지하게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체험은 그 어떤 이론에도 무너지지 않는 신앙 체계를 구축하게 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고 종교적인 신앙과 전혀 다른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5.4. 회심 이후의 삶

회심 이후의 삶은 베뢰아 목회의 다른 많은 강점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면을 보이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는 취약하다 하고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어떤 탁월한 논리나 이론, 가르침이라도 행함이 없으면 수명에 문제가 생긴다. 곧 진정성에 의심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다 마침내는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하는 궁지에까지 떨어질 수 있는 것이 변화된 삶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로 베뢰아운동의 주창자인 시무언이 애매히 욕을 먹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시무언의 과제가 아닌 듯하다. 그는 무엇보다 성경의 우선순위에 충실하였다. 베뢰아를 탄생시키고 베뢰아를 지켜내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인간적 한계를 다 쏟았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평소 그의 교훈이나 소신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이후에 그가 또 어떤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이고 온전한 삶, 이 세상에서의 처신과 봉사와 섬김에 대하여 지도하고, 여태 그렇게 한 것 같이 앞서 행동하며 본을 보일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이는 후세대의 과제여도 괜찮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생존 자체를 위하여 버티어 온 치열한 삶 그 이후에는 좀 더 멋있고 여유있게 앞 뒤 좌우를 돌아보면서 요즘 사람들이 선호하는 환경운동도 하고 남북문제도 관심을 가지고 가난한 이웃들도 구제하고 농어촌 교회와 사역자들을 섬기며 돌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탈북자와 다문화가정 같이 당장 현실이 되어 있는 문제를 포함하여 교회연합과 기독교의 토착화, 심지어 경제와 문화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정상이다. 정상적이어야 장기전을 펼 수 있고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6. 나가는 글

목회 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회관이 있고 자신만의 신학이 있다. 목회는 그리스도 교회의 목사가 하는 일상적 업무 일체를 일컫고 신학은 그 목회자에게 필요한 소양 중 특별히 지적·학문적 소양이라 하겠다. 이는 영혼에 대한 관심과 사명 그리고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과 이해 그리고 역사에 대한 판단을 필수로 하는 것이다. 목회와 신학은 서로의 필요에 의하여 협력하고 조화하며 역시 같은 이유에서 서로 견제하고 간섭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둘은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의 관계이다. 따라서 목회를 위한 신학, 신학이 있는 목회야 말로 바른 관계이다.
목회는 부단히 현장의 필요를 집행하고 신학은 목회를 진단하고 처방한다. 둘의 관계가 이상적이기 위한 현안으로 목회 경험이 있는 신학자와 신학적 소양이 깊은 목회자가 나와야 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여기에 더하여 역사적 현상에 대하여 필요한 감각이 부단히 유지되어야 한다고 하면 상당히 무리수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와 신학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정보 제공으로서의 독서(讀書)이다.
베뢰아 목회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 베뢰아적 관점이 녹아있는 『목회와 신학』류의 간행물이 아쉽다. 여기에 더하여 경험 많고 존경받는 선배 사역자들이 좋은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베뢰아운동도 신학이 있는 목회를 지향하고 목회를 위한 신학이 계속된다면 베뢰아 목회와 신학의 균형이 이뤄지고 이로 교회 성장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교회를 세워주신 주께 영광과 감사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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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tes, Wayne E. The Bible and Pastoral Care.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1.
Thomas, C. Oden. 『목회신학-목회의 본질』. 이기춘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1) 김기동, 『교회성장을 위한 목회실천원리』(서울: 베뢰아, 1988), 14.
2) Louis Berkhof, 『조직신학 하』, 권수경·이상원 역(서울크리스쳔 다이제스트 , 1993), 593-656.
3)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두 가지 표현으로 묘사되었고 목양에 대해서도 ‘양을 먹이라’고 하시고 또한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4) 김기동, 『요한복음 강해 6』(서울: 베뢰아, 2003), 271-6.
5) 구체적으로는 이주 노동자, 외국인 유학생 등의 문제를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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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한국교회의 살길은? <사설>  이동훈2008.12.04.
455 한국교회 신뢰도 18.4% <사설>  이동훈2008.11.26.
454 시무언이후시대의 서막 <사설>  이동훈2008.11.19.
453 체인지(CHANGE) <사설>  이동훈2008.11.12.
452 베뢰아신학의 모색 <신학산책 34>  이동훈2008.11.11.
451 두명의 감독회장 망신  이동훈2008.11.04.
450 경제위기의 격랑속에서 <사설>  이동훈2008.10.28.
449 2020 2000교회를 향해 <사설>  이동훈2008.10.21.
448 자살풍조, 이대로 둬선 안 된다 <사설>  이동훈2008.10.07.
447 정총 의장 인사말 2020 2000교회를 향하여  이동훈2008.10.05.
446 새로운 한국교회 리더들에 대한 고언(苦言) <사설>  이동훈2008.09.30.
445 한국교회 성장세 둔화 여전 <사설>  이동훈2008.09.23.
444 명절추석 유감 <사설>  이동훈2008.09.16.
443 위기의 한국교회에 새바람이 -총회의 계절- <사설>  이동훈2008.09.09.
442 주일신문 창립 15주년을 축하하며  이동훈200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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