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1.
 베뢰아신학의 모색 <신학산책 34>
글쓴이: 이동훈  날짜: 2008.11.11. 17:19:49   글쓴이IP: 58.235.179.56
이곳저곳 여러 군데 신학산책을 다녔다. 산책은 산책이라도 신학이 있는 산책, 신학으로 하는 산책이라는 구실로 시작한 것이 벌써 34회째로 만 3년이 되었다. 애초부터 전문 신학자도 아니어서 함께 하는 산책정도를 염두에 두긴 했으나 변명일 뿐 혹 너무 쉬운 잡생각은 아니었는지 조금 염려가 되기도 하다. 독자들의 너그러운 이해을 구해야 할 따름이다.
필자는 필자에게 주어진 몇 번의 대중강연 기회를 통해 신학은 기본적으로 어려워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것이 학문의 틀을 갖추는 한 기본적으로 논리적이고 일반이 채 미치지 못하는 이해와 깊이를 가질 수는 있어도 애써 알아들을 수 없도록 난해하거나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고 논리가 복잡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기독교신학의 원천이 성경이고 예수의 말씀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성경 어디에도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없고, 주의 말씀 어느 것도 사전 찾아보아야 할 만큼 어려운 용어가 없다. 오히려 주의 말씀은 언제나 일반의 예측을 뛰어넘는 평이함이 있었다. 최초의 타락이후 죄와 허물로 얼룩진 인생들의 마음과 이성이 하나님 말씀 듣기를 부담스러워하고 반면 세상이 속삭이는 소리에 더 귀 기울이는 것으로 인해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려는 의사가 없음으로 인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는 엉뚱한 말이 쏟아졌다. 진정 말씀하시는 말씀이 알아듣기 어렵고 내용이 난해해서가 아니라 순종할 의사가 없고 방향을 잘못 설정함으로 인해 뻔한 말씀도 어렵게 들렸던 것이다. 알아들어도 못 알아듣는 것 같은 시늉을 하는 것이다.
34회째 접어들면서 신학형성의 초창기인 고대의 교부신학이라든지 중세 카토릭신학의 역사적 배경과 그 시대의 몇 가지 신학사조들 그리고 그것이 개신교신학에 미친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영향들 또 현대신학의 보다 더 시사적이고 감각적인 흐름 등을 조금 더 둘러 볼 필요가 있음을 미리 지적해둔다. 기회가 주어지면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하여 함께 할 것을 약속드린다.
지금은 여러 정황들을 감안하여 베뢰아신학에 대하여 다시 몇 차례 더 둘러볼 필요를 느낀다. 가능하면 아주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신앙생활과 목회현장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보려 하나 그만한 역량이 될지 모르겠다. 함께 산책하는 독자들의 참여와 따가운 질책을 고대하는 바다.
1. 「베뢰아신학」이라는 용어
신학이 무엇이냐는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신학논의의 초동단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어서 여기서는 약한다. 그런 의미 졸고는 신학을 전제로 한다.
먼저 베뢰아가 신학이냐? 베뢰아가 신학을 필요로 하느냐, 베뢰아를 신학이라고 해도 되느냐, 베뢰아가 신학이 되도록 내어 놓아도 되겠느냐 등등의 논의가 있음을 주시한다. 일견하면 굉장히 시끌복잡해 보이고 소리가 요란할 것 같으나 이 모두 그럴듯한 형태로 말을 만들어서 그렇지 실은 미처 정리가 다 되지 않은 사고의 탓이다. 어려울 것이 없는 문제이다.
신학이 무엇이고 신학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알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아마도 베뢰아권 내부에서 신학의 문제 자체가 이런 방식으로 자주 논의되는 것은 시무언의 초기 강의에서 신학에 대한 부정적 표현들이 잦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를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마치 베뢰아는 신학이 아니다고 하고 신학과 상관없다고 하는 난센스가 가능해진다. 설교자로서의 시무언의 언급들은 말하자면 베뢰아신학 이전의 신학 문제이고 신학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면 때문이다. 베뢰아 이전의 신학이 그러했다는 뜻이지 신학자체의 부정이거나 베뢰아 신학의 출현 자체를 전면 부인하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두고 베뢰아는 신학과 무관하다고 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기 눈을 가리고 ‘누구 없다’ 하는 것과 같다.
일언하여 베뢰아는 신학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제대로 신학의 틀을 갖춘 보기드문 신학이다. 대부분은 오순절 신학의 경우같이 신학이전에 신앙현상이 있었고 이를 비난하는 외부로부터 방어하고 홍보하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체계화. 이론화라는 현실적 필요에 따라 신학이 형성되었다.
신학이 신앙이 정리정돈 되도록 이론화 체계화 하고 외부의 간섭과 공격 비난 등등의 문제 로 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더 나아가 따르는 회중을 양육하고 고무하며 신앙의 다음세대를 위한 나름의 체계라면 베뢰아신학은 신학의 전형에 속하는 신학이다. 신학의 형성 요건을 다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시무언 개인의 탁월한 노작에 의하여 상당한 자료가 확보되어 있다. 베뢰아를 신학이다고 하는 것은 여타와 같이 억지 짜깁기가 아니다.
베뢰아는 베뢰아가 한국교회의 화제로 등장하기 전부터 베뢰아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이미 신학 수업을 이수한 신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므로 애당초부터 신학적 성격이 뚜렷하였다. 이에 더하여 기독교 남침례회라는 지지교단의 창립과 동시에 서울침례신학교가 설립되고 계속해서 베뢰아대학원 대학교로 학위취득에 필요한 환경들을 갖추면서 베뢰아는 명실상부한 신학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신학의 형성
그러나 현실은 꼭 위와 같지만 않아 보인다. 더할 바 없이 충분한 신학적 요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관련 신학교와 시무언의 방대한 저작물들 또 베뢰아 관련 각종 출판물 등-이 모두는 내부의 문제일 뿐 베뢰아 내부를 벗어나면 베뢰아가 신학대접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학의 형성에 필요한 요건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베뢰아는 세계신학을 주도할 것이다고 할 수도 있으나 이는 베뢰아의 미래를 가장 낙관적으로 전망할 때이다. 필자가 일찍 그렇게 봤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꼭 그럴지는 역사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한다. 어쩜 그것은, 역사를 지켜보아야 한다는 소극적 태도보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베뢰아운동, 베뢰아사람, 베뢰아교회연합 총회 그리고 서울성락교회를 지켜보라 고 해야 더 맞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바다.
가장 최근의 생태계와 관련된 환경보존신학, 그리고 오순절신학, 그 이전의 교회성장신학 그 보다 훨씬 이전의 감리교를 배출한 알미니안주의 장로교의 배경이 된 개혁신학, 또 복음주의신학, 근본주의 더 나아가 한국의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등등의 신학들은 그것이 신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있었다. 각각이 조금씩 경우는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시대의 트렌드(trend:경향, 방향)라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에 그 같은 트렌드가 형성되었고 그런 트렌드를 제시하거나 강력하게 방향을 틀거나 이끌었던 신학적 뒷받침이 역할을 했다. 오순절신학의 경우는 한 세기 더 전 LA 아주사의 한 작은 기도실에서 시작된 방언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비난과 무시와 핍박이 없지 않았으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함으로 인해 그것은 자연스럽게 주류 속에 편입되었고 이제는 조용히 잠자고 있던 개신교회 전체를 오순절적 분위기로 바꿔놓기까지 했다. 교회성장신학은 거의 오순절성령운동과 보조를 같이하면서도 풀러신학교를 중심한 피터 와그너와 잔 앤 번 등의 학자들이 세계사적 자유 시장경제라는 팽창주의 경제원리와 맞물려 ‘교회성장’이라는 화두를 낳았다. 세계적인 초대형 교회들의 등장은 이 같은 신학과 분위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영향을 서로주고 받은 것으로 보인다.
종교개혁이후 20세기 말까지 개신교신학이 이같이 트렌드, 시대적 관심, 경향 그리고 특별히 무시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세력으로 등장할 때 그것은 신학의 한 흐름으로 받아들여졌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특정한 시대에 큰 트렌드가 앞서고 이어 그 큰 트렌드를 몰고 다니는 세력에 대한 신학적 작업이 진행되었고 그것은 곧 고유명사형태를 띠게 되었다.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싶다. 베뢰아신학이 한 시대의 깜짝 운동으로 머물지 않고 세계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세계교회를 견인할 수 있는 신앙운동과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베뢰아교회가 성장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오순절 교회가 이랬다. 특별히 국내교회가 곳곳에서 왕성하게 성장해야 한다. 서울성락교회가 그 답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판단으로 보인다. 한 시대를 이끄는 신학과 신앙운동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중성과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데 특정교회의 독주로는 보편성 확보라는 점에서 일단 미흡하다. 큰 기독교운동의 일부가 정통교회에 편입이 되지 못한 경우들이 그렇다. 이단 사이비로 정죄를 받는 집단들은 옳고 그른 것을 떠나 대중성, 기독교보편성 확보에 실패한 공통점이 있다. 거대한 집단이라도 특정한 교리와 지도력, 카리스마에 의해 특정집단으로 클 수는 있다고 보는 것이다.
거듭 언급하지만 기독교역사를 이끌기 위해서는 그 정당함이 보편성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술한바 베뢰아를 접하는 교회들마다 성장해야 한다. 성장과 변화 발전, 성숙이 보편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베뢰아교회연합에 속한 교회들의 성장은 개교회의 성장과 해당 목회자의 입신을 넘어 확신하는바 주의 복음을 확산 하는 일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20년이 더 지나도록 활력을 내지 못하고 있는 총회교회들에 대한 특단의 조치는 단순한 성장의 의미를 뛰어 넘어 베뢰아운동의 진로와 직결된 문제라 할 수 있다. 확실한 돌파구를 찾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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