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1.
 이단(異端) 이야기Ⅰ<신학산책39>
글쓴이: 이동훈  날짜: 2009.02.28. 17:48:55   글쓴이IP: 58.235.179.56
몇 회에 걸쳐 마음먹고「이단」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사실 이단이라고 정죄를 받는 입장에서 ‘우리는 이단 아니다’는 것만큼 재미없는 말도 없다. ‘그럼 이단이 자기 입으로 이단이라고 하겠느냐’가 돌아오는 답이다. 그렇다고 ‘그래 우리는 이단이다’ 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 당연히 우리는 이단이 아니니까. 아닌 것을 무슨 자랑이라고 거짓말을 해가며 긍정할 수 있을까 그도 한참 잘못된 말이다. 이렇게 말장난 같을 수 있는 것이 ‘이단논쟁’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 그래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 이단에 대하여 논의를 해볼까 한다.
글의 길이와 내용이 원하는 데로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단의 어원, 뜻, 정의 같은 것을 다시 정확히 살펴보고 둘째는 이단으로 찍히게 된 혹은 이단이 발생하게 된, 아니면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된 역사적 사례들을 찾아보고 셋째 왜 베뢰아를 이단이라고 하는지 항목들을 열거해보려 한다. 끝으로 이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가 글의 순서이다.

1이단(異端)의 의미 혹은 원뜻
영어로는 헤러시(heresy), 헬라어로는 헤 하이레시스(&#7969; &#7940;ιρησι&#962;)이다. 원래는 「학파」「종파」「당파」를 가리켰으나 점차 후에 ‘정통에 대한 반대’의 뜻으로 쓰였다. 첫 뚜껑을 열자말자 의미심장하다. 원래 ‘이단’이란 용어는 그렇게 험하고 흉악한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저 이런 저런 ‘학파’ ‘종파’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희랍어에서는 ‘독특한 주장을 하는 철학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용법은 유대교에서도 거의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에파 등의 ‘파’에도 하이레시스를 사용했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레니즘 용어와 유대적 용어들의 영향을 같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24:5에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를 가리켜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불러 기독교를 하나의 종파로 지칭했다. 또 다른 예는 새로운 기독교가 기독교 내의 당파들을 가리켜서 ‘이단’이라고 사용하게 된 것으로 이는 기독교회의 성립 이후 등장한다. 그 후 교회와 이단은 서로 배타적 관계로 이단을 가리키는 희랍어는 부정적 의미를 담기 시작했다.(고전11:18,19/ 갈5:20). 그러나 여기까지만 해도 교리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분열’ ‘나눔’ ‘편당’ 등의 지금 같은 의미는 발견되지 않는다. 좀 더 자세히 고전11:18,19에서 ‘이단’의 하이레시스나 ‘분열’의 스키스마(σχ&#943;σμα)가 나란히 나타나는데 이 구절은 고전1:10이하의 편당들이 분열, 분쟁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벧후2:1은 ‘거짓 선지자’들을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교회가 이단들’을 관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분열의 가능성을 어떻게 배제하느냐에 대해 신학적이고 주석학적 문제가 과제로 남는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이단’(하이레시스)은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뜻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비교적 ‘다른 생각’ 혹은 ‘다른 생각을 하는 학파’ ‘종파’의 뜻으로 크게 주관적이지 않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2.이단 정의(定義)의 발전과정
‘이단’이라는 용어 하이레시스는 원래 ‘선택하는 행위’ ‘선별’ 혹은 ‘부착’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행위나 사고의 흐름’을 뜻하다 나중에는 ‘철학적 원칙들’이나 ‘이러한 철학적 원칙들을 지닌 사람들’ 즉 앞서 언급한바 ‘학파’나 ‘분파’의 의미로 발전되었다. 이 용어가 구약성경의 헬라어판인 70인역에서는 ‘선악간의 선택’에 관련되었고(창49:5/ 레22:18,21/ 느12:40), 요세푸스의 글에서는 비난의 뜻을 담고 있지 않는 ‘한 파당’이나 ‘분파’를 의미하고 있다. 이는 또 사도행전(5:17/ 15:5/ 26:5)에서도 같은 뜻으로 쓰여진 반면 사도행전24:5절과 14절에서는 조금 다르게 강한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어쨌든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부정적 의미가 담긴 나쁜 뜻의 ‘분파주의’를 뜻하고 있기도 하다.(고전11:19/ 갈5:20/ 벧후2:1, 참조 딛3:10/ 고전1:10/ 11:18/ 12:25/ 롬16:17)
이단(하이레시스)이란 용어가 고대 교부들에게서는 이그나티우스에게서 처음 언급된다. 그는 이단이 교회의 단일성을 해치는 까닭에 이단을 기독교에서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하였다. 유스티누스는 이단자들을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 ‘신앙심이 없는 자’ ‘불경스런 신성 모독자’ 등으로 호칭하였다. 그 외의 교부들도 이단에 대하여 혹독하지는 않았으나 ‘전통적인 가르침을 그르치는 교의’를 뜻하는 말로 이해하고 사용했다. 또 다른 한 경우로는 이단(하이에시스)이 후기로 와서는 ‘자기의지에 대한 주장’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히폴리투스는 ‘기독교 신앙에 어긋나는 기독교 이전의 교의들’에 대해서도 이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애초의 ‘이단’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기독교 진리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는 아리우스 논쟁시(論爭時)로 접어들면서 이단은 ‘기독교의 근본교리에 상치되는 악마적인 것’으로 그 뜻이 보다 더 부정적으로 규정되었다. 한편 로마교회의 경우에서는 교회의 단일성을 파괴시키는 교의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위와 같이 이단에 대한 개념은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의 기관이며 구원의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신령한 기구라는 교회관의 발전과 함께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기독교 신앙의 독자적인 특성을 보존하기 위한 긴 투쟁에 있어서 교회는 기독교의 교의에 큰 강조점을 두게 되고 따라서 교회는 그 자체를 보존하는데 있어서 기독교 전통의 규정을 확정짓는 일을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필요를 따라 사도계승권이 확정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절대적인 권한을 주자 이단과 정통사이의 논쟁이 더 가열되고 그 결과 이단이 정죄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데오도시우스 2세의 통치시(382년) 이단은 완전히 죄악으로 규정되었는데 이러한 결정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개신교회 마저도 ‘이단’이라는 용어를 꺼려하고 있는 것으로 잘 나타난다.

3. 이단 정의사(定義史)를 통해본 두 가지 체크 포인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단’이라는 단어는 애초 ‘서로 다른 것’정도로 상당히 객관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변형되기 시작했다.
1)속권의 개입
신앙은 기본적으로 자유이다. 이 자유는 어떤 것으로도 제한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절대주권과 능력을 어느 정도까지 유보하신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이다. 다만 인간은 좌, 우를 임의로 선택하되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둘의 관계를 설정해 놓으셨다. 원천적으로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 어떤 기독교도, 진리도, 이치도 성립이 불가능하다. 자유가 없으면 신앙자체가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 자유는 신앙의 절대 전제이다. 신앙고백과 개인의 확신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실존의 자유에 의하여 확정된다. 그런데 이 절대 전제가 깨어졌다. 곧 이 원초적 자유와 그 자유의 권리에 대한 책임이라는 도식이 교권을 통해 통치기반을 강화하려는 세속권이 교회에 개입되면서 혼란이 온 것이다. 이는 이단사를 조명함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물론 그렇다고 기독교의 기본교리와 진리가 아무렇게나 내버려져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말을 그렇게 이상하게 꼬아서 하면 안 된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의 진리는 거룩히 온전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래 주셨던 기본권으로서의 자유가 타율에 의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의지의 자유, 선택의 자유, 사유(思惟)의 자유와 그 책임이라는 도식으로 이해되어야만 성립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의 일치되고 강력한 후원을 필요로 하는 교황권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교회가 자유를 제한 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정죄할 수 있는 교권이 되어버렸다.
2)교권의 발생이다.
즉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의지와 판단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와 그 권리에 따르는 책임은 신이 부여한 자연법이다. 그러나 거기 정치권력이라는 속권이 개입되면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신성한 신앙의 자유가 교회를 보존한다는 교권의 이름으로 간섭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본격적인 이단의 발생과 교권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자 동시에 속권과 교권이 또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가시적 조직으로서의 교회에 판단의 절대 권한이 주어지면서 교권이 형성되고 교권은 정통과 이단의 구분을 행사하게 되므로 결국 ‘이단정죄’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 원래는 여러 독특하고 다른 생각의 종파, 학파, 분파랄 수도 있었던 것이 ‘있을 수 없는 죄인’ ‘악마’ ‘죽어야 할 놈’으로 탈바꿈하게 된 배후에는 사람으로 말미암은 교권이 있었던 것이다. 교회사의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다. 많은 때에 인간은 잘 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님의 법을 건드리므로 화를 불러일으킨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베뢰아운동이 성경해석과 신앙체험과 신학의 자유를 표방함은 이와 같은 인간의 오류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때에 사람이 인위적으로 개입함으로 혼란스러움을 정리한다는 것이 혼란을 더 증폭시키는 격이 되었다.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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