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4. 19.

미혹의 영

글쓴이: 이동훈 날짜: 2016.01.10. 19:03:12 글쓴이IP: 121.175.24.115

아주 오래 되었으나 종종 기억나는 스토리이다. 왜 이렇게 싱거운 기억을 이따금 떠올리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큰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때 내 나이 몇 살이었을까. 영정이 앞서고 나이 차가 엄청 많았던 사촌 누님 형님들이 뒤를 이어 울며 따르던 기억이 난다. 큰댁 앞에서 노제를 지내는데 이웃 사람들이 많이 나와 엄숙한 얼굴로 구경을 하고 철없는 또래 아이들이 음식도 먹던 장면도 떠오른다. 당시 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의식에서 뭘 느꼈을까. 거기에는 어리기만 했던 나를 섬뜩하게 하는 어떤 기운이 있었다. 그와는 조금 대비 되는 다른 기억이다. 역시 아주 어렸을 적이다. 성탄절로 기억한다. 교회서 나눠준다는 빵을 얻어먹으러 교회에 갔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모였던지 손에는 빵 한 개를 들고 신발을 찾느라 혼이 났지만-신발을 잃고 가면 무서운 아버지께 얼마나 혼이 날까 무서웠었다.- 그래도 교회에 대한 꽤 상큼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그 후에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까지 그 길을 다니며 그 안의 사람들이 늘 궁금했다. 일종의 부러움 이었다.
반면 영문도 없이 상당히 절을 싫어하고 절에서 풍겨나는 기운을 싫어했다. 수도 없이 많았던 그동안의 소풍이며 산행에서 얼마나 여러 번 유명 사찰의 대웅전 앞을 지나쳤을 텐데 늘 거긴 쳐다보기 싫었다. 무시무시한 사천왕은 아예 쳐다보기도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 청년을 거쳐 장년이 되어서야 힐끗 보았다. 참 더럽게 생겼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아이였기 때문이기만 했을까.
어릴 적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으니 영에 대하여 들은 바가 없고 관심도 없었다. 아주 말초적 이면서 본능적인 어떤 불쾌감이었고 영에 대하여 죽은자에 대하여 느끼는 막연한 거부감이 전부였다. 그것은 13살 봄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고서도 별 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성경 곳곳에 귀신에 대하여 천사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으나 누가 한 사람 가르쳐주지 않았다. 관심을 촉구하지도 않았다. 신학생이 되고 목사가 되고서도 별 들은 바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30대 중초반 어느 날 영적으로 큰 목사님을 만나 그분이 전하는 전혀 새로운 말씀을 듣고서 180도 바뀌었다. 그 한 주간에 하늘이 꺼지고 땅이 솟는 것 같은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경험을 했었다. 울어도울어도 그렇게 많이 울 수 있었을까. 일주일 꼬박 매번의 예배때 마다 그렇게 울었다. 그동안 그렇게 읽으라 권함을 받고 읽기를 힘썼어도 재미가 없어 진전이 없던 성경이 환히 보였고 영의 세계가 보였다. 성경이 환하게 일목요연하게 조립이 되었다. 성경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성경이라는 시각으로 온 세상천지가, 인간의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 사고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해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정말 대단했었다. 세상이 완전히 달리 보였다. 색안경이란 말이 그렇게 실감나던 시기였다. 온통 성경으로 보는 새로운 세계였다. 성경에 담겨 있는 세계가 곧 내가 사는 세계였고 내가 사는 세계가 성경의 세계였다. 그동안 그렇게 미로 같았던 세상 사연이 환히 보였다. 열심이 이전 같지 않으나 그렇게 나 영혼에 들어온 기본기는 그 이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미혹의 영이 나를 도우라고 보내심을 받은 천사가 변질(타락과 구별)된 영이요 더욱 그것은 나 때문임을 알고 그렇게 흥미로웠다. 애써 나를 설득하지도 않았고 알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다. 마치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하면 영어를 배운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재미나게 영어가 머리에 속속 들어왔던 것과 똑 같았다. 미혹의 영은 귀신 못지않은 중요한 영이다. 어느 놈이 더하고 덜하다 할 수 없지만 미혹의 영이야 말로 더 우리의 삶에 근접해 살아가는 영이다. 미혹의 영을 모르면 삶이 컴컴해진다. 미혹의 영을 모르고는 삶의 복잡은 구조가 읽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고 내 생의 걸림돌이 되어 나를 괴롭히고 내 주위를 맴돈다. 때로는 그것이 환경이 되고 우연이 되고 옴 붙은 재수같이 나 주위에 머물러있다. 여전히 되지 못한 나 때문에, 나로 인하여 변질되고 형벌 받아야 할 내게 속한 나의 영임에도 면책을 받지 못하는 운명이 미혹의 영이다.
그 나는 도우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할 때만 나 아닌 내가 되어 좀 괜찮은 삶을 산다. 그것이 기도요 주의 일에 열심 할 때이다.
글. 이동훈 목사